내가 다니던 샤넬 부티크에는 문이 2개가 있다.

하나는 긴 웨이팅을 하며 지나가는 쇼핑객들과 눈을 마주쳐야 하는 메인 도어. 다른 하나는 VVIP를 위한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는 옆문. 구석진 코너에 있어서 백화점 2층 명품관인데도 이 쪽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내가 그 옆문 앞에 서면, 문을 지키고 있던 남자직원이나 나를 알아보는 SA(Sales Assistant, 판매직원)들이 내 담당 SA를 호출한다. 환하게 웃는 얼굴로 반겨주며 그녀가 나타난다. 나는 웨이팅이 필요없는 고객 중 하나이다. 불쑥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엔트리 모델인 카드 지갑이나 핸드백, 선글라스, 이어링, 구두 섹션을 지나칠 필요없이 바로 의류와 주얼리 코너로 들어가는 VVIP를 위한 급행 통로라고나 할까.

오늘은 누가 소파에 앉아 있나? 익숙한 얼굴, 자주 마주치는 비슷한 레벨의 고객들이 없는지 공간을 한바퀴 스캔 후 자리에 앉기도 전에 SA가 다가와 묻는다. "사모님, 당근주스, 밀싹주스, 자몽주스 중에 어떤 걸로 드릴까요?" "요즘은 당근주스 많이 드세요." 잠시 후, JW메리어트호텔에서 금방 내려온 주스들과 케이크가 테이블에 세팅된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달달하고 예쁜 것으로 혹시나 고객이 가질 '이번 달은 쇼핑을 자제하자'라는 방어막을 녹여버린다.

숨을 돌리자마자 SA가 들고 오는 옷들을 보면 묘한 기분이 든다. 내 스타일을 알아챈 듯, 내가 좋아할 수밖에 없는 것들만 조용히 내놓는다.

고객에게 '선택'이라는 환상을 주되, 그 모든 선택지가 이미 우리가 준비한 것들이라는 걸 모르게 하는 것.

이것이 내가 경험한 하이엔드 마케팅의 정교함이다. 고객의 취향을 '선점'하되, 그들이 자유롭다고 느끼게 하는 설계다. 그리고 그 어떤 것보다 웨이팅이 필요한 메인 도어에 서 있는 고객들과의 분리라는 공간적, 물리적 경험이, 당신의 특별함을 가장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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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 속에 속닥이는 듯한 대화와 큰 금액의 의류와 보석이 오가는 그 공간에서 내가 직접 겪은 확 깨는 일화가 있다.

어떤 여자가 떠들썩하게 메인 도어로 들어오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낯이 익은, 의류를 제작해서 판매하는 유명 블로거가 어린 딸을 데리고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소파에 가방을 내던지듯 놓고는, 아이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모한테 케이크 달라고 해."

순간적으로 공간에 퍼지는 정적. 나는 물론 다른 고객들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케이크 판매점에 가도 그렇게 말을 하진 않을 것이다. 여기는 케이크 판매점이 아니라 재킷 한 벌에 1,500만원인 '샤넬 부티크'이다.

브랜드가 세심하게 만든 경험을 '나는 돈 내는 손님이니 당연하다'는 식으로 소비하는 모습. 서비스를 권리처럼 누리되, 그 서비스의 격을 떨어뜨리는 태도. 그들이 입은 화려한 로고보다, 그 한 마디가 훨씬 선명하게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했다.

VVIP가 되는 건 지불 금액의 크기로 정해지지 않는다. 브랜드가 공들여 만든 경험을 '어떤 태도로 누리는가'로 정해진다.

샤넬은 모든 고객을 환영할 것이다. 매출을 내는 비즈니스이니까. 하지만 럭셔리 브랜드의 진정한 완성은 데이터로 취향을 선점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공간을 채우는 사람들의 '태도'에서 나온다는 걸 브랜드 마케터인 나는 안다.

당신의 브랜드는?

매출을 쫓는가? 내 브랜드의 철학과 가치를 함께 향유하는 고객과의 만남을 원하는가?

코로나 이후에 분명 브랜드의 방침이 달라진 게 보인다. 브랜드 마케터로서 아쉬움이 있다. 그 때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