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넬의 공방 컬렉션은 7년여 만에 다시 서울에 왔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2019년의 공방 컬렉션과 2026년의 공방 컬렉션은 매우 달랐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마티유 블라지로 바뀌어서일까. 마케팅 헤드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혹은 이번 캠페인을 맡은 팀이 유난히 넓고 빠르게 장면을 확산시켰기 때문일까.

외부에서 그 이유를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감각은 분명했다.

2026년의 샤넬 공방 컬렉션은 반가웠다. 마티유 블라지가 해석한 샤넬은 새로웠고, 볼거리도 많았다. 그럼에도 나는 시간이 갈수록 컬렉션 자체보다 그 컬렉션을 둘러싼 노출 방식에 더 지쳐갔다.

그 피로감이 아쉬웠던 이유는 단순히 많이 보였기 때문이 아니다.

공방 컬렉션은 원래 그렇게 소비되어서는 안 되는 행사에 가깝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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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나는 청담동 샤넬 메종에 있었다. 공방 컬렉션이 일반 관람으로 이어지던 시기였고, 나는 VVIP 세션으로 안내되었다.

6층에는 대중에게 열린 전시 공간이 있었다. 장인들의 작품을 가까이 볼 수 있도록 큐레이션되어 있었고, 도슨트의 설명도 좋았다. 멀리서 보면 장식처럼 보이는 것들이, 가까이에서는 전혀 다른 언어가 되었다.

그날 내가 가장 오래 기억하는 것은 쇼의 규모가 아니었다. 가까이에서 본 작은 재료들이었다. 구슬의 반짝임, 시퀸의 떨림, 파이예트가 빛을 받는 방식, 르사주의 트위드가 교차하는 밀도.

그러나 그 경험이 내 안에 깊게 박힌 순간은 7층이었다. 별도로 마련된 워크숍 공간에서 나는 샤넬 공방의 작업을 떠올리게 하는 실크 작업 벤치 앞에 앉았다. 보기만 해도 황홀해지는 반짝이는 구슬과 시퀸 볼을 직접 고르고, 바늘로 꿰었다.

나는 그 색과 모양을 골라 작은 머리핀을 만들었다. 10여 년 이상 여러 럭셔리 브랜드의 VVIP로 경험해온 순간들 가운데서도, 그 장면은 지금도 손에 꼽을 만큼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것은 단순한 '고객 초청 체험 프로그램'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격조가 있었다. 단지 고객의 손을 빌려 무언가를 만들어보게 했기 때문에 특별했던 것이 아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샤넬의 장인정신이 설명이 아니라 손끝의 집중을 통해 내 안으로 꿰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장인의 손은 빠르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작은 재료를 다루는 태도에는 기술 이상의 것이 있었다. 정확함, 자긍심, 시간에 대한 존중. 그 모든 것이 샤넬이라는 이름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공방 컬렉션의 힘은 화려함에 있지 않았다. 사람이 손으로 만들어낸 아름다움이 아직 브랜드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에 있었다.

나는 그날 샤넬을 소비했다기보다, 샤넬이 쌓아온 시간 앞에 잠시 앉아 있었다고 느꼈다.

그 기억 때문에 2026년 서울의 공방 컬렉션은 더 반가웠다. 장인들의 활약하는 공방에 대한 경의, 그리고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충분히 부를 수 있는 컬렉션이 다시 서울에서 이해되고 찬사받을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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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더 아쉬웠다.

뉴욕에서 먼저 공개된 샤넬 2026 공방 컬렉션이 서울에서 다시 선보였다. 장소는 공식 개관을 앞둔 퐁피두센터 한화였고, 마티유 블라지의 샤넬을 서울에서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했다.

브랜드 입장에서 보면 강한 조건들이었다. 서울, 새로운 미술관, 새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공방 컬렉션, 글로벌 셀러브리티, 앰배서더, 애프터파티. 기사화될 요소는 충분했다.

그러나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그 조건들의 합이 아니었다.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공방이었다. 장인의 손이 어떻게 현재의 샤넬 안에서 살아 있는지, 그 기술이 마티유 블라지의 해석 안에서 어떻게 다시 움직이는지, 이 컬렉션이 왜 여전히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설득이었다.

그에 비해 올해 내가 반복해서 본 장면은 달랐다. 7년 전에는 예약을 통해 대중도 6층 전시 공간에 들어가 장인의 작품을 가까이 보고,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공방 컬렉션이 하우스 안쪽의 언어라면, 그때의 샤넬은 그 언어를 일정 부분 대중에게 열어두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런 초대보다 다른 장면이 더 크게 보였다. 셀러브리티, 상위 고객, 인플루언서들이 쇼를 보고, 디제잉을 즐기고, 파티를 하고, 프라이빗 쇼를 보고, 오더하는 장면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그 장면들 안에서 대중은 공방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도록 초대된 사람이라기보다, 바깥에서 그 장면을 소비하는 사람처럼 놓였다. 샤넬이 보여주어야 했던 것은 단순한 접근의 차이가 아니라, 왜 이 컬렉션이 작품으로 불릴 만한가에 대한 설득이어야 했다.

더 놀라웠던 것은 이후 내게 도착한 어느 백화점 앱 알림이었다. 샤넬 공방 컬렉션을 구입하기 위한 매장 방문 예약 링크가 푸시로 왔다.

그 순간, 앞서 보았던 장면들이 다시 다르게 읽혔다. 공방 컬렉션이 장인의 손과 작품의 밀도로 남기보다, 구매 예약으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마케팅 동선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마케팅을 25년 이상 해왔다. 그래서 더 쉽게 넘길 수 없었다. 넓은 노출과 구매 전환이 중요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이 행사는 그런 방식으로 밀어붙일 대상이 아니었다고 느꼈다. 정말, 이것은 아니었다.

물론 공방을 설명하는 장면과 컬렉션의 아름다움도 있었을 것이다. 컬렉션 자체에도 흥미로운 해석과 볼거리가 있었다. 문제는 그것들이 충분히 중심에 놓였는가다.

내가 체감한 것은 미디어 노출의 홍수에 가까웠다. 공방 컬렉션이 가진 밀도보다 이벤트의 프리퀀시가 먼저 다가왔다.

그 순간부터 행사는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충분히 작품으로 기억될 수 있었던 컬렉션이, 과도한 노출 속에서 그저 그런 브랜드의 오버 프리퀀시처럼 느껴졌다.

이것이 유감이었다.

샤넬은 공방 컬렉션을 통해 단순히 또 하나의 쇼를 보여주는 브랜드가 아니다. 샤넬은 장인의 손을 하우스의 언어로 끌어올린 브랜드다. 공방 컬렉션은 그 언어를 가장 깊게 보여줄 수 있는 자리다.

그런 행사는 더 천천히 보게 해야 한다. 가까이 들여다보게 해야 한다. 아름답다는 말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 아름다움이 어떤 손의 시간 위에 서 있는지 이해하게 해야 한다.

그러나 이번 마케팅은 너무 넓고 빠르게 퍼졌다. 넓게 퍼진다는 것은 분명 성과일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성과가 브랜드의 깊이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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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를 보며 샤넬에 대한 선망이나 구매욕이 높아졌을까.

혹은 이미 샤넬을 충분히 경험하고 소유해온 고객에게는, 다시 한번 비슷한 장면을 본 것 같은 심드렁함이 남았을까.

샤넬이 이번 마케팅에서 목표한 것을 얻었는지는 밖에서 알 수 없다. 미디어 커버리지라면, 어느 정도 얻었을 것이다. 서울에서 열린 공방 컬렉션은 빠르게 보였고, 넓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목표가 공방에 대한 경의와 컬렉션의 작품성을 깊이 이해시키는 것이었다면, 나는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럭셔리에서 노출은 늘 조심스럽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는 진입점이 되지만, 오래 경험한 사람에게는 피로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특히 공방 컬렉션처럼 깊이와 시간이 핵심인 행사는 프리퀀시만으로 설득되지 않는다.

공방 컬렉션은 많이 보이는 것보다, 제대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유감스러운 것은 행사의 규모가 아니었다. 샤넬이 가장 깊게 말할 수 있는 공방의 언어가, 가장 얕은 방식의 노출로 소비되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번 컬렉션이 반가웠다. 마티유 블라지의 해석도 흥미로웠다. 그래서 더 아쉬웠다.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충분히 부를 수 있는 컬렉션이 있었다. 장인의 손과 공방의 시간이 있었다. 샤넬이 여전히 샤넬일 수 있는 이유가 그 안에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너무 많은 장면의 홍수 속에서 흐려졌다.

샤넬은 무엇으로 기억되어야 하는가. 내게 그 답은 여전히 공방의 손, 작품의 밀도, 그리고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한 시간에 있다.